Bladee & Ecco2k
Crest
Released on

너그러운 머신걸의 평:
10년대 후반에 들어서 갑자기 서양에서 인기 급부상을 하기 시작한 드레인갱. 그 전에는 사람들에게 무성의하게만 들렸던 블레이드의 랩이 어느샌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비트도 랩처럼 어딘가 힘 빠진 신스 멜로디 위에 약하게 얹어진 트랩 비트 때문에 다른 묵직한 래퍼들의 음악에 비교하면 처음 들었을 때의 임팩트가 꽤나 약하다. 지금은 드레인갱 팬들 사이에서 클래식으로 불리는 Eversince 앨범도 2016년 발매 당시 힙합씬에서 날아다니던 래퍼들을 생각하면 이들의 음악은 상당히 이질적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전혀 인지도가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컬트적인 인기가 조금 있었을 뿐 지금처럼 큰 이목을 끌진 못했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달려온 정규 앨범들 끝에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난같은 음악이 아닌 블레이드라는 세계에 점점 동조하기 시작한다. 마초적이지 않고 어딘가 유니섹스스러운 사운드와 무성의하게 뱉는 랩스타일 속에 숨은 섬세하고 내향적인 리릭시즘, 음악처럼 성의 이분법에 구애받지 않는 패션과 스타일들이 섞여 지금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드레인갱이라는 아젠다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여전히 대충 한 듯한, 가벼운 음악 스타일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지만 이들의 매력은 동시에 그런 단점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하이퍼팝이 이전에는 엽기적이고 천박하게 취급 받았던 가벼운 문화들을 단순 쾌락의 극단으로 끌어올려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음악씬에서 사운드적으로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일종의 수준 차이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의미없고 결국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인터넷의 영향력과 동시에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힙합 씬에서 플레이보이카티의 급부상.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괴랄한 애기울음소리같은 랩 스타일이 지금 사람들에게 뱅어 취급을 받으며 랩의 스펙트럼도 순식간에 확장되었고 그 확장된 가능성 안으로 드레인갱이 자동으로 발을 딛게 된 것이다. 거기다 블레이드의 소심한 랩과 존재 방황에 관한 가사들이 무리에서 잘 섞이지 못한 내향적인 인간들의 메마른 감정을 쓸어내리면서 극외향적인 기존 힙합씬 문화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얻게 된다. 속히 말해서 찐따들의 힙합. 물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음악이 이전에 없던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대충 말해)인디락씬의 감성과는 대조되는 부분이 자신의 약한 모습에 흐느끼며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드레인갱은 존재적 방황을 하면서 패션이나 마약에 과소비를 일삼고 단순 쾌락으로 정신적 고통을 진통시키려는 힙합의 쿨한 문화가 섞여 같은 계열의 다른 음악 세계들과는 확실한 차이를 둔다. 이 부분들이 지금 드레인갱의 큰 셀링 포인트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그렇게 짧지만 많은 앨범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길었던 커리어 끝에 가장 높은 완성도로 나온 앨범이 이번 crest 앨범이다. 이전 앨범들에는 몇몇 뱅어들을 제외하곤 확실히 거의 트랙수 채워놓기에 가까운 필러용 트랙들이 꽤 많았는데 이번 앨범은 모든 트랙 전부 정성을 들여 꽉꽉 눌러 담은 게 느껴진다. 거기다 5 star crest 트랙은 무려 8분 49초나 되는 힙합치고, 특히 드레인갱치고 아주 장대한 트랙을 담으며 과감한 실험성까지 갖추고 있다. 필러들은 최대한 빼고 9개의 트랙으로 진하게 녹여낸 이 앨범은 드레인갱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앨범이라 생각한다. 블레이드의 솔로 프로젝트가 아니라 에코투케이의 합작 앨범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앨범의 완성도를 한 차원 더 끌어올려 준 요인이 에코의 영향이 크다고도 보는데, 자칫 루즈할 수 있는 블레이드의 랩 사이로 에코의 깨질 듯이 연약하고 멜로딕한 보컬이 사운드를 훨씬 풍성하게 해줘서 몰입도의 수준이 크게 올라간다. 제일 주목할 부분이 드레인갱 멤버 중 프로듀서, 화이트아머의 사운드적 진보인데 8분짜리 2번 트랙에서는 거의 5번의 비트 체인지가 일어나면서 트랙 하나에서 폭 넓은 다양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앨범 전체의 구조적인 면에서 그저 루프를 단순 반복시키는 게 아닌 멜로디와 텍스쳐에 계속해서 변화를 주며 동시에 팝적인 구조를 충실히 따라가 블레이드의 랩과 에코의 멜로디가 환상적으로 녹아들어 듣는 순간 뇌에 각인되는 캐치함과 중독성까지 잡아낸다. 이런 정교한 신스와 사운드 디자인이 가상악기 기본 프리셋이나 샘플팩을 돌려 쓰는 듯한 대부분 트랩씬과 드레인갱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블레이드나 에코의 랩도 랩이지만, 화이트아머 및 다른 프로듀서들의 프로듀싱이 없었다면 드레인갱의 지금같은 음악정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앨범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White Meadow 트랙에서의 후반부 에코의 보컬이다. 밝으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멜랑콜리한 신스 위에 에코의 앳모스피어릭한 보컬 챠핑이 주는 완벽한 리듬감은 드레인갱 전체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말하고 싶다. 블레이드와 드레인갱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한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매 앨범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사운드적으로도 조금씩 완성도가 올라가고 있다. 관심없는 듯 시크하게 뱉는 블레이드의 랩과 그의 열정적인 음악 커리어와의 갭이 주는 매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된다.